友愛とは

나의 政治哲學(1/5)

[日本語 | English]

鳩山由紀夫

당료파 하토야마 이치로의 기치

현대의 일본인들이 선호하는 단어 중의 하나가「애(愛)」인데, 이것은 보통 영어로 love를 뜻한다. 그 때문에 내가「우애(友愛)」를 말하면 다수의 사람들은 어딘지 모르게 나를 유약하게 보는 듯 하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우애」는 이것과는 다른 개념이다. 그것은 프랑스 혁명의 슬로건인 「자유·평등·박애」에서 말하는 박애(fraternity)를 가리킨다.

나의 조부 하토야마 이치로께서 쿠덴호프 칼레르기(Nikolaus von Coudenhove-Kalergi)의 저서를 번역해 출판했을 때, 이 후레터니티를 박애가 아니라 우애라고 번역했다. 따라서 우애는 유약한 개념이 아니라 혁명의 기치를 수반한 전투적 개념인 것이다.

쿠덴호프 칼레르기는 지금부터 85년 전의 타이쇼(大正) 12년(1923년) 『범유럽(PAN-EUROPA)』이라는 저서를 간행해 이것을 통해 오늘날 EU로 연결되는 범유럽운동의 제창자가 되었다. 그는 일본 공사를 하고 있던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의 귀족(하인리히 쿠덴호프 칼레르기 백작과 麻布(아자부)의 골동품상의 딸 아오야마 미츠코의 차남으로서 태어나 栄次郎(에이지로)라고 하는 일본명도 가지고 있었다.

칼레르기는 쇼와(昭和) 10년(1935년)에 『Totalitarian State Against Man (전체주의 국가 대 인간 ;인간을 거스르는 전체주의 국가)』라는 저서를 출판했다. 이 책은 소련 공산주의와 나치의 국가사회주의에 대한 격렬한 비판과 그들의 진출을 허락한 자본주의의 방종(放縱)함에 대한 심각한 반성으로 가득차있었다.

칼레르기는, 「자유」야말로 인간 존엄의 기초이며, 지상의 가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유를 보장하는 도구로서 사유재산제도를 옹호했다.

그러나 그는자본주의가 심각한 사회적 불평등을 만들어내고 이에 대한 반발로 「평등」에의 희구가 공산주의를 태동시키고, 더 나아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양자에 대항하는 국가사회주의가 출범하는 것에 대해 깊이 우려했다.

그는 "우애(友愛)가 수반되지 않으면, 자유는 무정부상태의 혼란을 초래하고 평등은 폭정을 동반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오로지 평등만을 추구하는 전체주의도, 방종에 빠진 자본주의도 결과적으로는 인간의 존엄성을 손상시켜 본래 목적이어야 할 인간을 수단으로 전락시킨다고 했다. 인간에게 있어서 자유와 평등은 중요하지만 그것이 근본주의에 빠지면 그것이 가져오는 참화는 헤아릴 수 없다. 자유와 평등이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할 수 없게 균형을 도모하는 이념이 필요하고, 칼레르기는 그것을 「우애」에서 찾았던 것이다.

그의 저서「전체주의 국가 대 인간」은 "인간은 목적이며 수단은 아니다. 국가는 수단이며 목적은 아니다"라는 서두로 시작된다. 칼레르기가 이 책을 구상하고 있던 무렵, 두 개의 전체주의가 유럽을 지배해, 조국 오스트리아는 히틀러에 의한 병합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는 유럽전역을 돌아다니며, 범유럽을 주장하였고, 반(反)히틀러, 반(反)스탈린운동을 고취시키고 다녔다. 그러나 그러한 분투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는 나치에 병합되었다. 그는 실의 속에 미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영화「카사블랑카」는, 칼레르기의 도피를 모델로 한 것이라고 한다.

칼레르기가 설명하는 「우애혁명」은 그가 동시대에 직면한, 좌우의 전체주의와의 격렬한 싸움을 지탱해온 전투이론이었던 것이다.

2차대전 후, 수상이 되기 직전 공직에서 추방되어 낭인이 된 하토야마 이치로는 칼레르기의 서적을 읽어나가던 중, 특히 공감을 느낀「전체주의 국가 대 인간」을 번역해 「자유와 인생」이라는 서명(書名)으로 출판했다. 날카로운 공산주의 비판자이며, 군부 주도의 계획(통제)경제에 반대한 하토야마 이치로에게 이 책은 전후 일본에 휘몰아쳐진 마르크스주의 세력(사회, 공산 양당이나 노동 운동)의 공세에 저항해 건전한 의회제 민주주의를 만들어내는데 있어서 가장 공감할 수 있는 이론체계로 보였을 것이다.

하토야마 이치로는, 한편으로는 기세를 더해가는 사회당과 공산당의 양당에 대항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관료파 요시다 정권을 타도해, 당료파 하토야마 정권을 수립하는 기치로서 「우애」를 내걸었다. 그의 펜(무기)이 되는「우애 청년동지회강령(쇼와(소화(昭和) 28년(1953년)」 은 그것의 단적인 표현이다.

여기서 그는 "우리는 자유주의의 깃발 아래서 우애 혁명에 투신 해, 좌우 양 극단적인 사상을 배제하고, 건전하고 명랑한 민주 사회의 실현과 자주 독립의 문화 국가건설에 매진 한다"과 말했다.

그의「우애」의 이념은, 전후 보수정당의 본류로서 계속 유지되어 1960년 「미일안보조약」과 관련된 혼란을 수습하고, 자민당의 노사협조정책으로 자리잡아 일본의 고도 경제성장을 지탱하는 기초가 되었다. 그것의 상징이 바로 쇼와(昭和) 40년(1965년)에 강령적 문서로서 작성된 「자민당 기본헌장」이다.

강령의 제1장은 「인간의 존중」이라는 제목하에 "인간은 그 존재가 고귀한 것이어, 항상 그 자체가 목적이며, 결코 수단이어서는 안 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노동운동과의 융화를 구가한 「자민당 노동헌장」에도 같은 표현이 있다. 그것은 분명하게, 칼레르기의 저서로부터 인용한 것이며, 하토야마 이치로의 우애론에 영향을 받은 것일 것이다. 이 두 개의 헌장은 하토야마, 이시바시 내각 수립에 공헌하였고, 이케다 내각 때 노동부 장관으로서 일본에서 노사협조노선을 확립한 이시다 히로히데에 의해서 기초된 것이다.